프롤로그에서 우리는 두 개의 놀이터를 보았다. 이 장에서 나는 묻는다. 왜 하필 지금, 왜 이 세대의 아이들이 유독 디지털 성범죄에 취약한가. 스마트폰이 위험해서인가, 아니면 더 깊은 곳에 이유가 있는가.
내 답은 더 깊은 곳에 있다. 스마트폰은 하나의 물건일 뿐이고, 어느 시대에나 위험한 물건은 있었다. 진짜 문제는 그 물건을 쥔 아이의 손이 어떤 상태인가에 있다. 깊은 현실 경험으로 다져진 손인가, 아니면 그런 경험이 처음부터 없었던 빈손인가.
지금 한국에서 자라는 한 아이의 평범한 평일을 따라가 보자.
아침 일곱 시 반, 아이는 스마트폰 알람으로 일어난다. 어젯밤 열한 시 무렵까지 단톡방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잠들었으니, 잠은 늘 부족하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동안에도 한 손은 스마트폰에 가 있고, 부모는 잔소리를 짧게 하다가 결국 멈춘다.
학교에 도착하면 가방 정리보다 단톡방 확인이 먼저다. 수업이 시작되어도 책상 아래로 스마트폰이 진동한다. 쉬는 시간 십 분은 친구와 떠드는 시간이 아니라, 밀린 알림을 따라잡는 시간이다. 점심시간에도, 청소 시간에도, 학원 셔틀버스 안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수업이 끝나면 학원이다. 학원과 학원 사이는 셔틀이나 부모의 차로 이동하고, 동네를 혼자 걸을 일은 거의 없다. 학원에서 친구를 사귀어도, 그 친구를 학원 밖에서 만날 일은 드물다. 친구의 집이 어디인지 모르고, 친구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친구라는 말이 한 세대 전과는 다른 뜻이 되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숙제를 한다.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옆에 두고. 영상 하나, 알림 하나, 게임 한 판, 다시 숙제. 그렇게 자정 가까이 되어 잠든다. 부모는 거실에서 '아이가 방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일정은 모두 누군가가 정해 놓았고, 동선도 모두 누군가가 그려 놓았다. 자유 시간이라고 부르는 짧은 틈조차 손바닥 위의 스마트폰이 채운다. 우리는 아이가 빈둥거리는 모습을 잘 견디지 못한다. 빈둥거림이야말로 한 사람의 내면이 자라는 시간인데도.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의 아이들이 잃은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은 오히려 더 빽빽하게 채워졌다. 잃은 것은 시간 사이의 빈틈, 그리고 그 빈틈에서만 일어나던 경험이다.
부모 없이 친구 집에 갔다가 길을 헤매는 경험. 동네 슈퍼에서 잔돈 계산을 잘못해 당황하는 경험. 다른 학교 아이와 골목에서 마주쳐 어색하게 인사하는 경험. 모르는 어른에게 길을 묻고 그 어른의 얼굴을 기억하는 경험. 친구와 작은 일로 다투고 그 자리에서 화해해야 하는 경험. 자전거를 타다 무릎이 까져 약을 바르며 이 정도는 별일 아니라는 감각을 익히는 경험.
이 모든 것은 사소해 보인다. 하지만 사소하지 않다. 이 경험들은 아이에게 세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둘째, 그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나에게 친절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 셋째, 둘을 가려내는 일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쳐서만 익힐 수 있다는 사실.
이 세 가지를 보통 사회적 감각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감각은 안전한 거실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른의 시야 바깥에서, 아이가 자기 판단으로 작은 위험을 겪어 내는 순간에만 자란다. 모든 위험을 어른이 미리 제거해 준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위험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감각 자체를 갖추지 못한 채로 자란다.
이것이 사회학자와 발달심리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짚어 온 문제, 곧 자라는 데 꼭 필요한 경험을 빼앗긴 상태의 한 모습이다. 한 세대 전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그런 경험을 빼앗겼다면, 지금 세대 아이들은 거꾸로 지나친 보호 때문에 빼앗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