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아이가 자전거를 꺼낸다. 헬멧을 챙기고, 신발 끈을 묶고,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얹는다.
“엄마, 한 시간만 타고 올게.”
“어디까지 가려고?”
“동네 한 바퀴.”
엄마는 잠시 망설이다 말한다.
“위험해. 그냥 집에서 놀아.”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자전거를 다시 세운다. 신발을 벗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침대 위에 앉아 스마트폰을 켠다.
오후 네 시 십 분. 그 아이는 집 안에서 전혀 다른 곳에 들어가 있다.
단톡방 세 개에 동시에 접속해 있다. 인스타그램 DM 알림이 깜빡인다. 모르는 계정 하나가 친구 신청을 보내왔고, 어제 학원에서 한 친구가 공유해 준 익명 게시판도 열려 있다. 게임 채팅창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같이 팀을 짜자고 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몇 살인지, 어디 사는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묻지도 않는다.
부엌에서 엄마는 안심한다. 적어도 아이가 자기 방에 있으니까. 적어도 자전거를 타고 큰길로 나가지는 않았으니까.
이것은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거의 모든 가정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같은 아이를 두 개의 놀이터 사이에서 매일 바꿔치기하고 있다.
자전거는 위험하다며 못 타게 한 부모가, 스마트폰은 아이 손에 쥐여 준다. 골목길은 위험하다며 막아 두면서도, 단톡방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는다. 현실의 위험은 두려워하면서 디지털의 위험은 놓쳐 버린다.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그것을 위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틈으로, 누군가가 아이에게 접근한다.
자전거를 타다 다칠 확률과 단톡방에서 마음을 다칠 확률, 어느 쪽이 더 클까. 자전거를 타다 무릎이 까진 아이는 상처를 씻고 약을 바르면 며칠이면 낫는다. 하지만 단톡방에서 다친 아이는 어디를 다쳤는지, 그 상처가 얼마나 오래갈지, 어디서부터 회복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 위험을 위험으로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디지털 시대의 부모가 마주한 가장 큰 위험인지도 모른다.